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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란 뭘까 😱

시니어라는 말이 붙을 때 느껴지는 것들

연차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말이 있다.
“이제는 시니어잖아요.”

누가 공식적으로 임명한 적도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설명하는 역할, 설득하는 역할,
문제가 커졌을 때 앞에 나가는 역할이 기대된다.

어찌 보면 연차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변화이기도 하다.

그 기대를 충분히 채우지 못했다고 느껴지는 날에는
실망과 불만이 섞여 돌아올 때도 있다.
예전에는 그런 반응 하나하나를 다 책임처럼 떠안으려 했지만,
지금은 그 감정들까지 전부 짊어지는 게
꼭 건강한 태도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따라붙는다.

도대체 업계에서 말하는 “시니어”란 뭘 의미할까.
사실 이런 고민 자체를
얼마나 진지하게 나누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시니어도 어쨌든 한 사람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묵묵히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존재처럼 취급되곤 한다.

혹시 내가,
‘사람’을 뛰어넘는 어떤 기준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계속 이런 생각을 붙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틀린 걸까,
아니면 우리가 “사람인 시니어”와 “사람을 넘어서길 요구받는 시니어”를
한 단어 안에 함께 집어넣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그 기대를 통째로 거부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이면서도 책임을 지는 자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 경계를 조금이라도 더 분명하게 보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은
“시니어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정답을 말하려는 글이 아니다.
시니어라는 말에 따라붙는 기대와 책임을
어디까지 내 몫으로 받아들일지 가늠해 보면서,
그 무게에서 완전히 비켜서지 않기 위해
지금 내 곁에 두고 싶은 생각들을
한 번 정리해 본 기록에 가깝다.

설명과 실제 감각 사이의 거리

경험해보지 않은 걸,
느껴보지 않은 걸
느끼게 하고 깨닫게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말로는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몸으로 겪은 감각까지 그대로 건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큰 비용과 시간이 드는 일이다.

강의실에서든 회의실에서든, 기술적인 내용을 설명할 때든 도메인 지식을 주고받을 때든 이 어려움은 모양만 다를 뿐 계속 나온다.

그래도 일에서는
“그래도 설명은 해야지”라는 요구가 사라지지 않는다.
“개발에서 설명 불가능한 게 어딨어?”라는 말도
쉽게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그 말 역시
어느 정도는 착각에 가깝다.
서로 알고 있는 범위와 언어가 다르면,
동일한 문장을 듣더라도
전혀 다른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서 있는 자리와 쥐고 있는 정보가 다르기 때문에
비슷한 결로라도 전해지게 만드는 것조차 쉽지 않은 순간들이 분명 있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피드백의 투명성이 생각만큼 투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이 방향 괜찮아요”라는 말을 하면서도,
정작 평가나 의사결정에서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될 때가 있다.
체면을 지키기 위해,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말을 순하게 고쳐 쓰다 보면,

당사자가 정말 알아야 할 정보는
끝까지 흐릿한 상태로 남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괜찮다고 해서 그대로 해왔을 뿐인데,
왜 이제 와서 문제라고 하느냐”는 당황함을 느끼고,
반대로 피드백을 주는 쪽에서는
“분명 여러 번 신호를 보냈다”고 기억하게 된다.

리더십 교육에서도 자주 나오는 장면이다.
피드백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머릿속에 쌓아 둔 “대화 로그”가
얼마나 쉽게 서로 어긋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예라고들 한다.
나도 여러 번, 그 사이 어디쯤에서 어색함과 민망함을 같이 느꼈던 기억이 있다.

양쪽 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서로가 느끼는 현실은 아주 다를 수 있다.
이 간극이, “느끼게 만드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런 거 몰라도 개발할 수 있잖아요.”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하게 불편해졌던 시기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다.

실제로 몰라도 어느 정도 일정 수준의 개발은 된다.
기능은 만들어지고, 일정은 맞고, 서비스는 돌아간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대부분의 팀에서
그 정도면 충분히 “일이 된다”.

그런데도 그 말을
쉽게 넘기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아마 “몰라도 된다”는 표현을
“그 정도는 몰라도 괜찮다”가 아니라
“그 정도는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처럼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말을 가볍게 했다가
“그럼 이 일에서 네가 책임질 수 있는 건 뭐냐”는 식으로
호되게 지적을 들었던 기억도 있다.
그런 경험들이 겹치면서,
“몰라도 된다”는 말을 들으면
가볍게 흘려보내기 어려운 마음이 남게 되었다.

일을 하다 보면,
“이 개념을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문제였겠구나” 싶은 트러블들을
반복해서 마주하게 된다.

조금만 더 알고 있었다면
그만큼까지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 것 같은 밤들.

그리고
그걸 설명할 언어를 미리 갖고 있었다면
사람들을 설득하느라 덜 소모됐을 것 같다는 자각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알아야 한다”는 말은
열정이나 성실을 과시하려는 태도라기보다는,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다 보니
어느새 선택하게 되는 방향에 가까워진다.

동시에,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또 저렇게 열정과 성실을 내세우네”라고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 역시도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그런 태도를
그렇게만 읽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렇게까지 열심히”와 조직의 현실

많은 동기부여 문장에서 이런 말을 한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누구나 늘 120%로만 살 수는 없고,
각자 삶에서 챙겨야 하는 역할들이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집에서의 역할이 더 중요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업무보다는 건강이나 관계가 우선일 수도 있다.

그걸 단순히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부르기는 어렵다.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기 몫을 나누고 조정해 가는 일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조직 구조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맡은 역할과 책임이 다르고,
모든 구성원이 같은 방식과 같은 양의 고민을 해야만 하는 구조도 아니다.

주변에서는 가끔 농담처럼
“일은 적당히, 월급은 정확히” 같은 말을 주고받곤 했다.
입에 잘 붙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이 왜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 오르내리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은 이해가 된다.

경영진들 역시
누가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를
섬세하게 구분해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지표와 일정이 맞으면
“일이 잘 되고 있다”고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현실과 맞물려 있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몰라도 어떻게든 굴러가는 일들이 많고,
웬만한 일은 그냥 그렇게 지나간다.

전체 맥락을 맡게 되는 사람들

그럼에도 이상하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설명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사람은
대체로 비슷한 얼굴들이다.

문제가 커졌을 때
“이거 전체 맥락 아는 사람 없어요?”라는 말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하고 불려지는 몇 사람이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때때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내린 결정도 아닌데도,
그 결과에 대한 설명과 책임을 맡는 쪽으로
어쩌다 보니 역할이 손에 쥐어지곤 한다.

그때 드는 생각은 대체로 이렇다.

시니어라는 건
“사람들을 깨닫게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일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다 보면
어디에서 막히고, 어느 부분에서 비용이 튈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게 된 사람에 가깝다는 것이 아닐까?

어디에서 비용이 발생하는지,
언제쯤 그 대가가 돌아오는지,
책임이 보통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그 과정을 몇 번은 통과해 본 사람.

그래서 어떤 말들에는 조금 더 예민해지고,
어떤 결정 앞에서는 괜히 한 번 더 멈칫하게 되는 사람.

연차가 쌓인다는 건
단순히 기술 스택이 늘어난다는 뜻이라기보다,
“이건 이렇게 흘러가면 나중에 이런 모양이 되겠구나” 하는 감각이
시간을 따라 축적된다는 뜻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이 다시 보이면
가능하면 그 전 단계에서 한 번 더 확인하고,
미리 브레이크를 밟아보려 하게 된다.
크게 터지기 전에 방향을 조금이라도 틀어보려는 쪽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느낌에 가깝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아무 일 없게 막아낸 순간들은
대부분 기록되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지 않고 지나가면
애초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일에서 어느 정도의 생색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막아낸 일들까지 일일이 셈하고 말로 남기기 시작하면
그 또한 다른 종류의 소모가 되곤 한다.
어디까지를 드러내고 어디부터는 조용히 흘려보낼지,
그 중간 어딘가를 찾는 일이 늘 어렵다.

게다가 미리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내놓은 대안이
나중에는 “괜한 브레이크였다”는 식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면,
조용히 막아낸 일들을 어디까지 품어야 하는지
경계가 더 모호해진다.

내가 바라는 ‘어른’ 같은 시니어

반대로, 나는 결국
조금이라도 ‘어른’ 같은 시니어에 가까워지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어른’은
모든 걸 다 알고 흔들리지 않는 완성형 인물이 아니라,

  • 조금 더 느리더라도 상대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언어를 찾으려고 애쓰고,
  • 당장은 티가 안 나더라도 나중을 생각해서 방향을 같이 틀어 보려고 하고,
  •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보려는 시도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 가깝다.

물론 이런 태도는
연차에 걸맞은 어느 정도의 실력과 감각을 전제로 한다.
같은 문제를 다시 마주했을 때
조금 더 빠르게 맥락을 파악하고,
새로운 것들을 이전 경험과 연결해 배우는 속도가
예전보다는 붙어 있는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빠르고 단호한 지시보다
훨씬 오래 걸리고, 에너지도 많이 든다.
애써 설명해 줬는데도
전혀 와닿지 않는다는 표정을 마주칠 때도 있고,
오히려 “괜한 소리 한다”는 취급을 받을 때도 있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어른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내가 맞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일을 하다 보면 결국
같이 오래 갈 수 있는 사람과
같이 버티면서 성장하는 구조가 더 낫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쑥스럽지만,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은
이쪽에 더 가깝다.

아마 죽기 직전까지도,
진짜 어른이 되었다기보다는
그냥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흉내 덕분에
조금 더 안전한 선택을 하고,
조금 덜 후회하는 길로 돌아서게 된다면
그 역할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건 쉽지 않은 길이다.
그래서 더 자주 흔들리고,
“나도 그냥 단순한 방식으로 밀어붙일까” 싶은 유혹이 찾아온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그 부족함을 알고도
여전히 그쪽을 향해 가 보려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것 같다.

상상의 동물로 불리는 시니어

예전의 “시니어” 이미지는 좀 더 선명했다.

기술을 잘 알고,
상황에 맞는 더 나은 선택을 해주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의욕을 끌어올려 주는 존재.

어디선가 그런 시니어가 있을 것 같았고,
그런 사람과 한 번쯤 같이 일해보고 싶었다.

어느 강사가
그런 존재는 사실상 “상상의 동물”에 가깝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러니 네가 그런 존재가 되어라”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대로 한 발씩 실천해보려고
어설프게나마 버둥거리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확률적으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 역할을
“시니어”라는 이름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주 드물지만,
그 기대를 묵묵히 견뎌내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도
팀과 조직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옮겨 놓는,
말 그대로 실재하는 “상상의 동물” 같은 사람들.

그런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그 모습을
모든 시니어가 당연히 해내야 하는 기본값으로 놓는 순간,
서로에게 지나치게 가혹해지는 지점이 생긴다.

물론, 직급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 그런 가혹한 현실을 전제로 버티면서도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게 하려는 일을
각자의 자리에서 반복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전제가 “그러니 누구나 똑같은 수준으로 해내야 한다”는 말까지
포함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얄팍한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어차피 난 원래 못해”라고 주저앉기보다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조금씩 나아가 보려는 쪽에 서 있고 싶다.

각자의 선택과 함께 버티는 자리

결국 이런 생각으로 자주 되돌아오게 된다.

아무리 오래 설명해도
방향을 정하는 건 내가 옳아서가 아니라,
그 말에 동의할지 말지는 결국 그 사람이 선택하는 일이다.

조금 더 오래 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선택지를 대신 골라주는 게 아니라,
“이렇게도 볼 수 있다”는 관점을 하나 더 얹어두는 일에 가깝다.

앞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예로 들거나,
조금 느리더라도 함께 생각해 보는 자리를 만들거나,
한 번쯤은 멈춰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을 가리켜 주는 정도.

현실에서는 또 다른 역할도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 그대로 머리채를 잡고라도 끌고 가야 하는 순간들.
“이건 지금 당장은 귀찮더라도,
여기서 안 해두면 나중에 더 크게 돌아온다”는 걸 이미 아는 사람일수록
그 역할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어렵다.

그 부담이 크다고 느끼면서도
결국 다시 손을 올리는 쪽에 서게 되는 것,
어쩌면 그 지점이 이 역할의 가장 힘든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되는 질문

그래서 지금은,
누군가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거대한 역할이라기보다는
“이쯤에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하다” 싶은 지점을
조용히 가리켜 줄 수 있는 사람에 가깝게
시니어를 떠올리게 된다.

과거에 겪었던 순간들과
지금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상황이
늘 정확히 겹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비교적 비슷한 패턴과 흐름을
조금 먼저 봐온 사람,
그 정도의 거리감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려 한다.

어쩌면 시니어란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채
그래도 같이 고민해 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정의 역시
언젠가 다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 글 역시, 지금의 내가 이해하는 ‘시니어’에 불과하다.
언젠가 다시 읽고 얼굴을 붉힐 날이 오더라도,
그때의 나까지 포함해 이 질문을 남겨 둔다.

시니어란, 뭘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