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폭의 시대, 자극과 속도 사이에서
어느 순간, 나는 사소한 장면 앞에서 생각이 길어졌다.
왜 굳이 노출로 저 정도를 살짝 보여줄까.
그저 예뻐서일까,
아니면 이미 반응을 알고 있는 선택일까.
처음에는 단순한 의문이었다.
어쩌면 예전 같았으면
그냥 "좋다" 하고 지나갔을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더 넓은 구조로 번 진다.
자극은 관심을 만들고,
관심은 눈에 보이는 반응으로 남고,
그 반응은 다시 자극을 강화한다.
스마트폰을 통해 무엇이든 쉽게 보이고,
플랫폼은 반응이 빠른 것을 더 빠르게 퍼뜨린다.
욕망은 어느새 속도를 얻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묘한 기류를 느꼈다.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약간의 위화감과 씁쓸함에 가까운 감정.
곰곰이 생각해보니
노출 그 자체가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나는 욕망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욕망은 인간을 움직이는 힘이고,
관계를 만들고 삶을 생생하게 하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이 너무 빠르게 소비되고,
너무 가볍게 반복되는 장면처럼 보일 때
나는 잠시 멈칫하게 된다.
어릴 적 나는
성과 욕망은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절제가 미덕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 감각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안다.
이 현상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예전에도 있었고, 다만 덜 보였을 뿐이다.
지금은 기술이 그것을 더 쉽게 드러내고, 더 크게 증폭시킬 뿐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비난하기보다
내 자리를 점검해보고 싶었다.
나는 이 빠른 흐름 속에서
어디쯤 서 있는 사람일까.
무감각해지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도덕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도 쉬운 길이다.
하지만 둘 다 나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예전에는 솔직함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솔직함 도
조금은 더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아마도 나는
욕망을 부정하지도,
그 속도에 완전히 몸을 맡기지도 않는 쪽에 서 있고 싶다.
자주 마주하게 될 장면들 앞에서
과하게 흔들리지도,
괜히 냉소적으로 굳어지지도 않으면서
그저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이 글은 그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남겨두는 작은 메모에 가깝다.
나는 지금,
증폭의 시대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 호흡을 지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