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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쓰는 집. 그냥 지내도 되는 집.

자취는 전라도 광주에서 시작했다.
회사 때문에 1년 내려가 있었고, 원룸이었다.
그때는 공간을 다듬기보다는, 거기에 맞춰 사는 쪽에 가까웠다. 버티는 집이었다.

그 다음은 투룸 전세였다.
2억 2,500만 원 대출을 끼고 계약했다.
더 잘되면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머무는 집이라기보다는 지나가는 집에 가까웠다.

그 시기에는 세대주로서 처음 전세 계약을 했다.
국가가 관리하는 제도 같은 줄 알았는데, 결국 개인과 개인의 계약이었다.
그 사실이 생각보다 선명했다.

계약금을 보내던 순간에는 한 발 들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뒤로 물리기 어렵다는 감각도 같이 왔다.

집주인과 대화를 하면서는 또 다른 현실을 배웠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도 계약은 성립한다는 것.
'배째라'는 태도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

그때부터 집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당연하지만, 내가 사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빌려 쓰는 공간이었다. 어릴 때 친구 물건을 빌릴 때처럼, 깨끗하게 쓰고 그대로 돌려줘야 할 것 같은 감각이 따라붙었다.

못을 박으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예전에는 왜 그 일로 그렇게 큰 소리가 오가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박을 일도 없었지만, 못 하나를 박는 일도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 이유를 대략 짐작은 한다.

그 일을 지나고 나서 집을 고르는 기준이 조금 바뀌었다.
확장 쪽으로만 기대를 거는 방식은 생각보다 쉽게 흔들렸다.

그 다음 월세 집에서는 방향을 반대로 잡았다. 아늑함과 안정감을 먼저 두려고 했다.
세팅도 공을 들였다.
전체적인 컨디션은 좋았지만, 소음과 구조가 생활과 잘 맞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몸도 같이 흔들렸다.
좋은 집과 맞는 집은 다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이번 집으로 이사한 지 한 달이 됐다.

조금 허름하다. 대신 겨울에 충분히 따뜻하고, 넓고, 구조가 마음에 든다. 시장과 지하철도 가깝다.

입주하자마자 손을 많이 댔다.
싱크대와 화장실 수전을 교체하고, 가스레인지를 들이고, 식기세척기를 다시 연결했다.
창문을 분리해서 닦고, 선반과 수납도 정리했다.

예전에는 좋은 집을 고르려고 했다면, 지금은 조건을 맞춰가며 쓰고 있다.

도약대를 기대하고 들어온 집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런 생각이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은 점프를 위해 집을 쓰기보다,
집을 버팀목으로 두는 쪽이 더 맞다. 잘되면 나가는 집이 아니라, 여기서 잘 되게 하는 집에 가깝다.

지금은 그냥 이 상태가 맞는다.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