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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이라는 말은 왜 이상하지 않을까

화장실이라는 말은 가끔 이상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그 공간에서 하는 일은 용변, 세면, 샤워 같은 일들인데, 이름은 ‘화장실’이다. 화장하는 방이라니. 기능만 놓고 보면 조금 비껴간 표현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쓴다.

생각해 보면 이런 단어는 꽤 많은 것 같다. 죽음을 바로 말하기보다 돌아가셨다고 말하고, 나이를 직접 드러내기보다 연세가 많다고 말한다. 해고됐다고 하기보다 회사를 떠나게 됐다고 말하고, 싫다고 말하기보다 조금 어렵겠다고 말한다.

조금 더 들여다보니 이런 표현을 영어로 euphemism, 한국어로는 완곡어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완곡어법은 불편하거나 거칠 수 있는 표현을 조금 부드럽게 바꾸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핵심은 사실을 없애는 데 있다기보다, 사실을 그대로 드러냈을 때 생기는 민망함이나 충돌, 무례함을 조금 덜어내는 데 있는 것에 가깝다.

특히 죽음, 나이, 질병, 실패, 용변처럼 인간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제들에서는 완곡어법이 거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하는 것 같다. 다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그것이 조금 더 촘촘하고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편인 것 같기도 하다.

그 이유는 아마 체면과 관계의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동아시아에서는 말을 단순히 정보 전달의 수단으로만 다루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말이 맞는가보다, 이 말이 어떤 분위기를 만들까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상대를 무안하게 하지는 않을지, 관계를 거칠게 만들지는 않을지, 지금 이 자리에 맞는 온도인지를 함께 살피게 되는 식이다.

그래서 직설적인 표현은 종종 부정확해서라기보다, 너무 바로 닿기 때문에 피하게 되는 것 같다.

틀렸다고 바로 말하는 대신 다르게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못 한다고 잘라 말하기보다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때 언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이면서도, 동시에 관계를 너무 거칠지 않게 유지하기 위한 장치처럼 쓰이는 것 같다.

화장실이라는 말도 그런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변소나 뒷간 같은 표현이 더 기능적이고 직설적이라면, 화장실은 그 공간을 조금 더 사회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식으로 바꿔놓은 이름처럼 느껴진다. 용변을 보는 공간을 단장의 공간으로 덮어놓은 셈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물론 실제 기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말의 표면이 바뀌면서 우리가 그 공간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조금 달라지는 것 같기는 하다.

이런 점에서 완곡어법은 단순히 말을 예쁘게 꾸미는 기술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불편한 현실을 그대로 부수지 않고, 사회 안에서 다룰 수 있게 만드는 완충장치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 싶다.

물론 이 방식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배려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임 회피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지나치게 완곡한 표현은 상대에게 친절하다기보다 피로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말의 진짜 뜻을 읽어야 하는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떤 사회가 무엇을 어떻게 돌려 말하는지를 보고 있으면, 그 사회가 무엇을 민망해하고 무엇을 조심하며 어떤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화장실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생활어만은 아닌 것 같다. 그 말 하나 안에 위생, 체면, 민망함, 예절, 근대적 세련됨 같은 감각이 겹쳐 들어 있는 셈이니까.

우리는 종종 단어를 그냥 사용하지만, 가끔은 그 단어가 왜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화장실이라는 말도 그렇다. 용변을 보는 공간에 왜 화장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언어는 현실을 그대로 복사하는 도구라기보다, 현실을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다듬는 기술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에 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