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은 누구의 것일까
가끔은 결과물 하나만으로도
이전과는 결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건 좀 다른데?” 하고 눈이 가는 작업.
대개 그런 결과물은 개인의 감각에서 시작된다.
오랜 시간 쌓인 취향,
선택의 기준,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눈.
말로 다 설명되지는 않지만,
분명히 작동하고 있는 어떤 기준들이다.
그런데 이 결과물이 조직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 감각은 다른 방식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조직은 감각을 이해하기보다
재현 가능한 형태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야 사람을 바꿔도 결과를 유지할 수 있고,
한 번 잘 된 것을 반복 가능한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 번째 어긋남이 생긴다.
개인은 이렇게 느낀다.
“이건 내가 만든 결이다.”
조직은 이렇게 본다.
“이건 우리가 확장할 수 있는 포맷이다.”
같은 결과물을 두고
전혀 다른 언어가 붙는다.
이 어긋남은 처음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성과가 잘 나오면
서로 좋은 상태로 지나가기도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감각이 조직 안에서 반복되기 시작할 때,
개인은 이상한 감각을 느낀다.
내가 만든 기준이
내가 없는 곳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이때 드는 감정은 단순한 경쟁심과는 조금 다르다.
“이게 이렇게 쓰이는 게 맞나?”
“나는 이 과정에 있었나?”
“내가 이걸 만든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있나?”
이 질문들은 숫자로 잘 증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설명하기 어렵다.
겉으로 보면
성과를 낸 사람이 더 많은 권한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
감각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좋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기준이고,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에 대한 감각이자 정체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돈이나 성과만으로는 잘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조직에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
개인의 감각에만 기대는 구조는 불안정하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시스템은
확장하기도 어렵고,
유지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조직은 자연스럽게
그 감각을 시스템 안으로 흡수하려고 한다.
결이 살아 있는 작업일수록
조직은 그것을 더 오래 남기고 싶어 한다.
반복하고, 정리하고, 다른 사람도 쓸 수 있게 만들고 싶어 한다.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감각이 만들어진 맥락까지 함께 다뤄지지 않으면
당사자에게는 쉽게 소외처럼 느껴질 수 있다.
설명 없이 진행되는 확장,
참여 없이 이루어지는 재현,
존중 없이 소비되는 감각.
이 세 가지가 겹치는 순간,
이건 협업이라기보다
침식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갈등이 시작된다.
개인은
“존중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조직은
“원래 이렇게 돌아간다”고 말한다.
둘 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서로가 보고 있는 대상이 조금 다르다.
한쪽은 감각을
자기 안에서 오래 만들어온 기준으로 보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재현 가능하고 확장 가능한 구조로 본다.
그래서 이 문제는 종종
자존심 싸움이나 유난으로 축소된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은
쉽게 오만처럼 번역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구조를 들여다보면,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충돌에 더 가깝다.
감각을
유일한 것으로 볼 것인가,
재현 가능한 것으로 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다를 때,
같은 작업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람은 종종
자신이 만든 것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이건
드문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일하는 방식 안에서
반복해서 생겨나는 장면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