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느림은 때로 자비처럼 보인다
가끔은 세계가 차갑고 폭력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너무 많이 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신화나 종교 이야기 속 존재들은
대개 판단이 빠르다.
인간이 몇 마디 잘못하면
곧장 벌이 내려오고,
선을 넘었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응징으로 이어진다.
무서울 정도로 단순하고,
때로는 웃길 정도로 속도가 빠르다.
그런데 현실의 세계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서로의 눈치를 보고,
명분을 따지고,
이해관계를 재고,
괜히 질질 끌면서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그 모습은 답답하고
우유부단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 복잡한 지연이
하나의 완충 장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빠르게 심판하는 쪽이
더 강하고
더 분명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 바로 결론내리고
바로 응징하는 세계가
꼭 더 나은 세계인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의 세계는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우유부단한 방식으로라도
한 번 더 미루고,
한 번 더 따지고,
한 번 더 참는다.
물론 그 느림이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다.
책임을 미루기 위한 핑계가 되기도 하고,
해야 할 말을 끝내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분명 잘못된 일을 보면서도
미적지근한 태도로 시간을 끄는 일 역시
현실에는 아주 많다.
그래서 그런 느림은
자주 애매한 장면으로 남는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느림 덕분에
너무 빠른 파국이 늦춰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누군가가 감정적으로는
당장 끝내버리고 싶어 하는 일을,
세계는 끝내지 못한 채 버틴다.
그 모습은 답답하지만,
동시에 아주 얇은 자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보다 세계가
신보다 자비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세계가 특별히 선해서라기보다,
쉽게 끝내지 못하는 구조를
갖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그 점이 조금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